고향소식지

[스크랩] 전남 신안 재원도

블루오션 목건네 2014. 5. 21. 14:55

   신안 재원도

 

민어·부서 파시가 그리운 섬, 재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까지 열린 파시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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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이 많이 들어와 있는 재원도 포구 배와 그물들이 널려 있다.
ⓒ 이재언

 


 

 

 

 

 

 

 

 

 

 

 

 

 

 

 

 

 

 

 

 

 

 

재원도 개요

목포에서 북서쪽으로 45㎞, 면소재지인 임자도에서 서쪽으로 1.1㎞ 해상에 자리잡고 있는 재원도는

비금도, 자은도 등과 함께 서남해의 큰 바다와 접해 있기 때문에 뱃길로는 매우 중요한 섬이다.

재원도는 넓이 5㎢, 해안선 길이 11㎞의 작은 섬이다.

이런 조그마한 섬에도 무려 200명 안팎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이루며 살고 있지만

  외지인들이 찾지 않는 고적한 섬이기도 하다.

재원도는 서쪽으로 트인 만 주변부와 동쪽 해안 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다.

남·북쪽에는 산괴(山塊)가 있고, 중앙부의 동·서쪽에 해안 저지대가 있어

  동쪽해안에 재원리, 서쪽해안에 예미마을이 들어섰다.

농사라 해야 마을 뒷산을 개간하고 사람이 살다 떠난 집터를 일궈 고추, 상추 등 밭농사를 짓는 것이 전부다.

예전에는 높은 구릉지까지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모두 묵히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이 어업에 종사한다.

재원도는 신안군 지도읍 점암에서 배를 타고 임자도를 거쳐 1시간여 걸려 도착하는 작은 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임자면에 속하지만, 임자면 진리 선착장에서도 뱃길로 40여 분이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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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원도 포구 바다에서 바라다 보이는 재원도 마을
ⓒ 이재언

 


 

 

 

 

 

 

 

 

 

 

 

 

 

 

 

 

 

 

 

 

 

 

재원도는 옛날부터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섬이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중국 상해가 나온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러 가기 위해서는 길목인 이 섬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섬 앞바다의 풍랑이 심해 항해가 어려운 동절기에는 날씨가 풀리는 3~4월에 수송하기 위해

  이곳에다 양곡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그래서 섬이름을 재원도(財源島)라 불렀다.

그 후 임자도 본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재원도(在遠島)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사람의 입도시기는 약 270여 년 전, 여량 진씨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온다.

여느 섬이나 마찬가지이듯 재원도 역시 농사 지을 땅이 없는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범선 안강망 배가 있었지만,

  이곳의 바다가 워낙 험하고 물살이 거세어 어획에 실패한 후부터 어선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쌀밥과 고기국은 명절과 제사때에만 구경하고 보리밥과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던 가난한 섬마을이었다.

그래도 섬사람들이 이렇듯 가난한 섬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미역과 톳, 우뭇가사리, 뜸부기, 전복 등 자연에서 얻는 혜택 때문이었다.

해안에 정박하고 있는 고깃배에 찾아가서

  뱃사람들에게 생필품인 나무와 물, 김치, 술 등을 팔거나 생선과 물물교환을 하면서 살아왔다.

낙후된 재원도 주민들이 고기잡는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파시(波市)가 사라질 무렵이었다.

젊은이들이 타지역의 고기잡는 배를 타면서 어획기술을 익힌 덕이었다.

1977년 경에 진성인, 강대율, 함택산 세 사람이 낭장망으로 어장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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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닻배와 선원들 물이 빠지기 전에 바쁘게 일을 한다.
ⓒ 이재언

 


 

 

 

 

 

 

 

 

 

 

 

 

 

 

 

 

 

 

 

 

 

 

재원도의 가구수는 83가구이고 선박은 45척에 이르지만,

  실제로 배를 가지고 있는 호수는 20여 호에 불과하기 때문에 호당 두세 척의 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배들을 닻배라고 한다.

임자도 전장포와 재원도 닻배들에 의해서 많은 새우가 잡히고 있다.

중국젓새우, 돗대기새우, 둥근돗대기새우 등이 많이 잡힌다.

5월에 잡히는 새우로 담근 젓갈 오젓과 6월에 잡히는 새우로 담근 젓갈 육젓은

  그 빛깔이 너무나 하얗고 곱던지 백화새우(둥근돗대기새우)라고 불린다.

임자도 새우잡이는 커다란 자루모양의 팔랑개비 그물이지만, 재원도 새우잡이는 닻그물을 이용해 새우를 잡는다.

길이가 10m에 달하는 쇠로 만든 닻을 이용해 그물을 바다에 고정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닻그물은 서남해역의 대표적인 새우잡이 방법으로,

  폭 4m에 길이 8m인 그물 23폭을 바다에 드리워 그물에 붙은 새우를 잡는다.

그래서 새우를 잡는다는 표현보다 "새우를 턴다"고 한다.

닻그물을 이용한 새우잡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그물이다.

하루에도 드는 물과 나는 물 두 번씩 네 번을 바닷물에 담그고 꺼내기를 반복해야 하고,

조류를 이용해 새우를 잡기 때문에 그물은 단단하고 조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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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닻배의 모습 새우를 잡는 딫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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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둘러보기

선착장에서 북쪽 끝자락을 보면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바로 상항월도(上項越島)라는 무인도가 연결되어 있다.

돌을 쌓은 징검다리로 연결되어 육계도(陸繫島)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해안의 조그마한 방파제 옆에 작은 모래해변이 이어진다.

산중턱에 산책로 비슷한 길이 섬을 두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중간에 사라진다.

섬의 가장 남쪽지점이 톡 튀어나왔는데, 중간부분은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지형으로 초원지대다.

마을 뒤 산길을 따라가면 중간에 예미재가 나오고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모래해안으로 이어진다.

배를 타고 이 부근을 지나면서 보니 예전에 있었던 예미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북부와 북서부 및 여러 곳에 해식애가 발달하였는데 암석절벽 군데군데 붉은색 벽옥(碧玉)이 맥(脈)을 드러내고 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북쪽 뒷산(244m)에 올라가면 한눈에도 누가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할 정도로 아담하다.

마을에서 슈퍼마켓도 볼 수 있었는데, 식당과 만물상을 겸하고 있었다.

마을의 가장 북쪽지점에 마당이 넓은 보건진료소와 슬라브 지붕을 인 경로당이 있었다.

북쪽 방파제 앞은 온통 갯벌이다.

북쪽방파제가 오른쪽으로 꺾여 들어가는데 그 지점까지 갯벌이다.

방파제 밖이 바다이고 안쪽은 갯벌인 셈이다.

이 방파제 옆은 모래밭과 갯벌이 혼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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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샘 물이 귀한 재원도에 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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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도 파시

재원도는 민어와 부서파시로 유명한 섬으로서 우리나라에서 파시의 모습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곳이다.

재원도는 작고 한적한 섬이지만 과거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절이 있었다.

재원도 파시는 1989년 경에 막을 내려 이제는 과거형이 되고 말았으나,

1960년대부터 병어와 부서 그리고 민어의 큰 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재원도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천혜의 항구를 갖고 있어

5월부터 8월까지 파시를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300여 척의 배로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파시(波市)는 조기나 민어, 고등어, 삼치가 한창 많이 잡히는 때에

섬이나 포구에서 어선과 상선 사이의 일시적인 직거래와 그 주변지역의 상거래까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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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닻배가 들어와 그물을 싣고 있다. 물이 들어오면 배들이 들어와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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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이를 파시평(波市坪) 또는 파시전(波市田)이라 하였고, 위와 같은 정경을 파시풍(波市風)이라 하였다.

파시라는 말이 처음 소개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때였다.

파시가 열리는 시기이면 배에 필요한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가게들, 술집, 여인숙 들이 북적거렸다.

1970년대 재원파시가 한창일 때, 수백 척의 배들이 재원도에서 임자도 목섬까지 꽉 들어차 건너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역선이 떠서 배에서 잡은 고기를 즉각 손질하여 일본으로 수출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배들은 외지인들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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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이 바진 재원도 포구 물이 빠지면 갯벌이 드러나 항구의 구실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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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산란기가 되면 알을 낳으러 몰려든 민어가 '꺽꺽' 우는 소리에 잠을 못 잘 정도였어."
"배들이 두 섬 사이에 꽉 차서 배만 밟고 임자도까지 건너간다 그랬지."

이곳 출신이자 파시를 경험한 함근산(78)씨의 회고담이다.

그는 이어서 80년대 중반까지 파시가 성할 때에는 술집과 다방이 20여 곳이나 될 정도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흑산도에서 술집과 다방을 열어 장사하던 유흥업자들은

5월이면 고기가 북상하기 때문에 어류의 북상에 따라 흑산도에서 비금도 송치로,

자은 사월도와 증도 상월포로, 다시 임자도 전장포와 재원도로 이동했다.

그들은 전북 위도까지 올라가 장사를 하다가 겨울을 지낸 후 다시 흑산도에 모여드는 등 철새처럼 파시를 따라 이동을 했다.

바다 위에서 고기를 잡는 일은 단조롭고 위험하다.

그래서 뱃사람들의 마음에는 흙과 김치, 여자와 술이 그리워 재원도 항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험한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재원도에 입항하면 뱃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여자를 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또한 싸움이 그칠 날이 없고, 각 지방 선원들끼리 패싸움도 했다.

선원들 중에는 이 섬마을 처녀와 결혼도 하고 자기 배도 소유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선원들은 선불금을 받아 유흥비로 탕진 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많은 선원들이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힘들고 위험한 고기잡는 일은 3D 업종 중에서도 가장 열악하기 때문에 내국인들은 기피한다.

요즈음은 외국인 선원들을 고용하고 있다.

또한 젊은 어부는 없고 늙은 어부들만 있어 한국 어업의 미래가 어둡기만 하다.

근래에 와서는 어업기술의 발달과 남획으로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재원도 부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근의 서해바다에서 병어, 민어, 새우 등 고급어종들이 많이 잡힌다.

재원도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민어파시가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재원도 파시는 서남해안에서 가장 늦게까지 버텨온 파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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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어전에 고사를 지내는 어선 마을 앞 바다에서 고사를 지내려고 준비중인 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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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도 출어고사

예로부터 바다에 나가 풍랑이나 빠른 조류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은 늘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에

무엇인가 의지하는 신앙심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뱃고사라는 전통 제사인데 이곳 재원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식이라 하겠다.

뱃고사의 종류로 출어고사, 명절고사, 배내리기(진수) 고사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출어고사는 출어시 지내는 제사로 열무새, 스무새날 밀물이 들어와 조류가 잔잔해졌을 때에 거행되는 것이다.

명절고사는 상원(上元), 추석 등 세시(歲時)에 지내는 고사.

배내리기 고사는 배를 새로 샀거나 건조하여 진수할 때 지내는 고사이다.

요즈음은 건조된 선박을 가까운 조선소에서 사가지고 오기 때문에 진수고사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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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부와 뱃고사 어선에서 고사를 지내는 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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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어고사는 열무새, 스무새날에 가장 많이 하는 것으로 선주가 고사를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선주에 부정이 끼었을 경우에는 선장 또는 선원중 윗사람이 주관한다.

어획이 지나치게 적거나 사고가 잦을 때는 무당을 데리고와 고사를 지내는 경우도 간혹 있다.

제주(祭主)가 될 선주는 그날 일진이 나쁘면, 선장이나 선원중 윗사람의 일진을 보고 그를 제주로 선정한다.

제주의 자격은 까다롭다.

제주로 결정된 사람은 그 후부터 가정에 초상이나 출산이 없어야하고

가족원 중 생리하는 여자가 없어야 하는 등 온갖 부정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때 제물로 쓰이는 어물은 최근 출어시 첫 어획에서 잡힌 크고 귀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한 어물은 배에서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다.

상서로운 고기인 조기는 반드시 제물로 마련해둔다.

반면, 비늘이 없는 갈치, 장어, 홍어, 간재미 등은 형태가 비정상적이고 보기 흉하다고 생각되어 절대 제물로 올리지 않는다.

특히, 갈치와 장어는 몸체가 길어 뱀을 연상시킨다 하여 기피했다.

고사는 뱃서낭 앞에 상을 차리고, 고물·이물 순의 상차림으로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제주가 상마다 술을 한 잔씩 붓고 재배를 한다.

마지막으로는 상에 놓인 음식 중 일부를 떼서 바가지에 넣고, 고루 섞어 바다에 뿌린다.

이는 용왕에게 헌식을 하는 의식이다.

헌식시에는 "사고 없이 잘 지내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한다.

재원도를 여러 차례 방문하다보니 재원도는 임자면 중에서도 마을전통을 충실히 이어온 곳임을 잘 알 수 있었다.

2008년도 설에 방문했을 때는 수십 년 동안 시행하던 농악이 경연자가 부족해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 섬만의 사정이 아니라 모든 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안타까움이 컸던 기억이 있다.

재원도는 다른 섬보다 탐사선 등대호를 타고

2012년에 2박, 2013년에도 2박을 하면서 주위 섬들을 돌아본 잊지 못할 섬이다.

재원도 지리

재원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10′, 북위 35°07′에 위치하며 면적 5㎢,

해안선 길이 11㎞, 산높이 224m, 연 평균기온 섭씨 14.1도, 강수량 1172mm. 인구는 83가구 205명이다.

목포시에서 북서쪽으로 45㎞, 임자도에서 서쪽으로 1.1㎞ 해상에 자리잡고 있다.

재원도 가는 길

점암―재원도, 신해10호, 1일 2회 / 소요시간: 50분
오전 8시, 오후 2시 30분

 

 

   

출처 : 비단들
글쓴이 : 다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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